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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애국의 한평생 1』중에서 1장 2.미군정통치를 저지시키는데로 -대를 두고 안겨주신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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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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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애국의 한평생 1』중에서

 

 

제    1    장

통일적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건설의 길에서

 2. 미군정통치를 저지시키는데로

대를 두고 안겨주신 사랑

 

1948년 3월초 어느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외국류학을 위해 강습을 받고있던 여러 강습생들을 만나주시는 자리에서 통일애국투사 박영발도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감격에 겨워하는 그를 자리에 앉혀주시면서 동무에 대해서는 해당 일군들을 통해서 알고있었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남조선에서 미제와 리승만도당의 매국배족적인 책동을 반대하여 굴함없이 싸운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여주신 후 그의 고향과 가정래력이며 지나온 생활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 화천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인간이하의 천대를 뼈저리게 체험한 그는 일찌기 항거의 길에 나섰다가 세차례에 걸쳐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였으며 형무소에서 8. 15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후 그는 남조선에서 미제의 영구분렬책동을 반대하여 투쟁하였으며 9월총파업과 10월인민항쟁에 참가하여 핵심적역할을 하면서 굴함없이 싸웠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7년 10월 그를 평양으로 불러주시고 어느 한 교육기관에서 공부하도록 하시는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그의 경력을 들으시고 동무는 해방전에는 반일독립투쟁에 나서서 고생을 많이 하였고 8. 15후에는 남조선의 어려운 정세속에서도 미제국주의자들과 리승만도배들의 매국배족적인 책동을 반대하여 잘 싸웠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를 하시였다.

그러던 1948년 8월 중순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영발을 비롯한 강습을 마치고 류학을 떠나게 되는 일군들을 또다시 몸가까이 불러주시고 간곡한 가르치심을 주시였으며 친히 오찬까지 마련하여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곁에 앉아있는 박영발을 비롯한 남반부에서 들어온 여러 통일애국투사들을 믿음어린 눈길로 바라보시다가 우리 조국강토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기 위한 투쟁을 한시도 잊지 말고 류학기간에 공부를 잘하여 통일운동의 핵심으로 튼튼히 준비되여야 한다고 간곡히 교시하시였다.

이처럼 위대한 수령님의 간곡한 가르치심을 받아안고 류학을 갔던 박영발은 미제와 리승만도당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에 접하자 즉시 공부를 중단하고 동무들과 같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런 그의 소행을 높이 평가하여주시면서 그에게 조선로동당 전라남도위원회 위원장의 중책을 맡기시여 현지로 파견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에 의하여 도당위원장의 사업을 수행하게 된 박영발은 우선 도안의 당, 정권기관과 근로단체조직들을 꾸리고 청장년들을 의용군에 탄원해나서도록 하는 한편 인민들을 전쟁의 승리를 위한 전선원호사업에 떨쳐나서도록 힘있게 불러일으켰다.

바로 그러하던 1950년 8월 28일 저녁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라남도당 위원장인 박영발에게 친히 전화를 걸어주시였다.

한 평범한 당일군을 잊지 않으시고 평양으로부터 수천리 떨어진 광주시 도당청사의 자기 사무실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렇듯 전화를 걸어주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박영발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축축해옴을 어쩔수 없었다.

그가 자세를 바로가지면서 높뛰는 가슴을 애써 누르고있는데 송수화기에서는 《도당위원장동무입니까?》라고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인자하신 음성이 울리였다.

박영발은 가슴에 다시금 뜨거운것이 북받쳐오르고 목이 꽉 메여 《장군님! … 제가 박영발…》 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어 《그동안 건강은 어떻습니까?》라고 하시는 그이의 친근한 음성이 또다시 귀전을 울리였다.

그는 건강한 몸으로 일하고있다고 대답을 드리고는 참을길 없는 격정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시 자애깊은 음성으로 그에게 평양을 떠나 광주로 가는 길에 서울에서 가족들을 만나보았는가고 물으시였다. 그가 가족을 만나보았다고 말씀드리자 수령님께서는 못내 기뻐하시며 동무가 가족을 만나보았다니 나도 마음이 좀 놓입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해방을 맞이한 전라남도안의 인민들의 정신상태와 당조직복구사업에 대하여 그리고 토지개혁진척정형과 토지개혁에 대한 농민들의 반향에 대하여서도 물으시였다. 그러시고는 전라남도에 대한 미제의 폭격과 함포사격만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료해하시고 미제는 지금 최후발악을 하고있다고, 놈들의 발악은 날이 갈수록 더해질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러나 미제침략자들의 폭격과 포격만행이 악랄해질수록 놈들에 대한 인민들의 분노와 적개심은 더욱더 커질것이라고 교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그에게 오늘의 전선형편으로 보아 전쟁의 승리가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고 자만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하시면서 적들의 음흉한 전략적기도와 관련하여 전라남도당앞에 나서는 중요과업들에 대하여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제시하여주시였다.

그이의 가르치심은 가장 엄혹한 전쟁시기에 그의 가슴속에 드놀지 않을 억센 신념의 기둥을 세워주었다.

우리 인민군대의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였을 때였다. 지리산으로 들어간 그는 유격투쟁을 과감무쌍하게 벌려 도처에서 미제침략자들과 괴뢰군경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겨주었을뿐아니라 괴뢰행정기관, 철도, 도로, 다리 등을 습격하여 파괴함으로써 적들에게 막대한 혼란과 공포와 불안을 주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적들의 창고들을 기습하여 로획한 식량을 인민들에게 나누어준것만 하여도 무려 수만가마니에 이른다.

여러해동안의 어려운 적구투쟁과정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담가에 실려다녀야 하는 형편이였으나 그는 잠시도 투쟁을 멈춤이 없이 언제나 전투장에서는 앞장에 섰고 그 어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주저와 동요를 모르고 한번 다진 맹세를 굽힘이 없이 견결히 싸웠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러한 그를 잊지 못하시며 그가 시련과 난관을 헤쳐나가도록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며 변함없이 이끌어주시였다.

1953년 2월 5일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영발의 적후투쟁공적을 높이 평가하시여 그에게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으며 그 이듬해 1월 1일에는 그에게 새해축전까지 보내주시였다.

이렇듯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을 가슴에 새겨안고 유격대에 대한 적들의 《토벌》공세에 대처하여 힘겨운 전투들을 련속적으로 벌려나가던 그는 지리산 박양봉전투에서 그만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그날은 바로 1954년 3월 19일이였다.

마지막순간에 그는 자기 전우들에게 이런 말을 남기였다.

김일성장군님의 부하로 싸운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요. 나에게 한이 있다면 미국놈들을 이 땅에서 내쫓고 조국을 통일시켜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가는것이요. 동무들! 내가 죽으면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평양의 하늘이 바라보이는 곳에다 나를 묻어주오.》

그는 이렇게 최후를 마치였다. 하지만 그는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비길데 없는 민족의 어버이의 믿음과 사랑속에 통일애국의 대오속에 영생하는 삶을 누리고있다.

주체50(1961)년 8월 15일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에서 살고있던 박영발의 유가족을 몸소 찾아주시였다.

뜻밖에도 명절날에 그처럼 흠모해마지 않던 위대한 수령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된 그의 안해 류필이녀성은 높뛰는 가슴을 진정할수 없었다.

《수령님!》

그는 격정에 목이 메여 이렇게 한마디를 떼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쏟고야말았다.

이때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하다가 방학기간이여서 집에 와있던 그의 아들 명훈이가 거수경례를 붙이며 그이께 인사를 올리였다.

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시고 명훈이의 손을 다정히 잡으시며 휴가왔는가고 물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의 어깨와 머리를 몇번이고 쓰다듬어주시면서 이름은 무엇이고 몇학년인가, 나이는 몇살인가에 대하여 물으시였다.

열다섯살이라는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열다섯, 아직 집주인이 되려면 멀었구나.》라고 말씀하시였다.

이어 걱정어린 안색으로 명훈이를 찬찬히 살펴보시다가 열다섯이면 키가 크다고, 그런데 몸은 좀 약해보인다고 하시며 앞으로 학원에서 체육을 많이 하여야 한다고 교시하시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아들에게 부어주시는 그이의 친어버이사랑에 가슴뜨거움을 금치 못하는 류필이녀성의 뇌리에는 수령님의 은혜로운 품속에 안겨 행복하고 보람찬 삶을 누려온 나날들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전라남도당 위원장으로 파견되여가던 남편을 만나본 후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에 오른 인민군대를 따라 공화국북반부로 오게 된 그들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영발의 안해를 학교에 보내여 공부시켜 공장지배인으로 내세워주시였으며 아들 명훈이도 만경대혁명학원에 보내여 아버지의 뒤를 잇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고 오늘은 이렇듯 그들의 집에까지 찾아오시여 육친적사랑을 안겨주시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류필이녀성에게 생활에서나 공장사업에서 애로되는것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하시였다. 그리고 집을 떠나실 때에는 첫째는 건강해야 하고 다음은 아이들 공부를 잘 시키며 남편의 복수를 위하여 일을 잘하여야 한다고 뜨겁게 교시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통일애국의 길에 한몸바친 박영발을 늘 잊지 못하시며 그의 안해가 생일 60돐을 맞을 때에는 은정어린 선물도 보내주시였고 또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하고 인민군대군관으로 복무하고있는 그의 아들이 결혼식을 하게 되였을 때에는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사랑의 선물도 안겨주시였다.

통일애국렬사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끝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는 절세의 위인의 믿음과 은정속에 박영발은 공화국영웅으로,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삶을 빛내이게 되였으며 애국렬사릉에 영생의 모습으로 빛나게 되였다. 위대수령님의 탄생 70돐을 맞으며 그의 부인 류필이에게 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가 수여되였으며 그후 인민군대군관이 된 아들 명훈은 로력영웅으로 성장하였다.

참으로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통일의 구성이신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의 손길아래 민족의 숙원인 통일위업에 한몸을 내댄 애국의 대오는 무수한 숲을 이루며 억척같이 자라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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