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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 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애국의 한평생』(1)중에서 1장. 4. 전조선통일정부수립의 나날에 -애국지사의 아들을 첫 도시경영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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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작성일17-10-03

본문

이북도서 김일성주석 통일애국의 한평생』(1)중에서

 

 제    1    장

통일적민주주의자주독립국가건설의 길에서

4. 전조선통일정부수립의 나날에

애국지사의 아들을 첫 도시경영상으로

 

공화국의 창건이 온 세상에 선포되던 력사의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헤그밀사사건으로 세계를 들썩하게 한 애국지사 리준의 맏아들인 리용선생에게 공화국의 첫 도시경영상이라는 중임을 맡겨주시였다.

리용선생은 해방후 북청에 김일성장군님환영위원회를 조직하고 지방인민정권기관을 세우는데 앞장섰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지난날 알게 되였던 사람들이 서울에서 한번 만나자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 소식에 접한 그는 미제의 남조선강점으로 하여 나라가 분렬될 위험에 처하던 때에 자기가 잠시 서울에 나가 나라의 통일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되돌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38°선을 넘게 되였다. 미제의 부추김밑에 온갖 반동들이 모여들어 살판치는 남조선의 어지러운 정국에서 갈길 몰라 모대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김일성장군님의 민족대단합의 깊은 뜻을 안겨주며 날을 보내던 과정에 그는 북으로 돌아올 길이 막히자 서울에 머물면서 진보적인 세력들로 신진당을 뭇고 그 당수로 활동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전에는 물론 해방이후에도 나라를 위하여 한몸을 바치려고 애쓰는 그의 애국적량심을 귀중히 여기시며 평양에서 열리는 4월남북련석회의에 초청하시였다.

그가 평양에 도착한것은 련석회의소집을 여러날 앞둔 4월중순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라의 분렬을 막기 위하여 통일대책을 세우는 민족회합을 마련해가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그가 도착하자 곧 만나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년세도 높은 선생이 38°선을 넘어오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는가고 따뜻이 위로해주시면서 선생이 해방전에는 반일투쟁을 하느라고 수고가 많았고 해방후에는 서울에 나가 활약하느라고 수고가 많았는데 건강은 어떤가고 념려해주시였다.

이윽하여 흥분을 눅잦힌 리용선생은 《장군님! 제가 뭐 한 일이 있습니까. 새 조국건설에 다망하신 장군님께 심려만 끼쳐드린줄 압니다.》라고 정중히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아닙니다라고 하시며 그의 수고를 다시금 헤아려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리용선생과 마주앉고보니 만국평화회의연단에서 자결한 리준선생이 생각난다고 하시며 리준선생이 피를 뿌리며 숨질 때 바란것이 무엇이였겠습니까, 두말할것없이 그것은 조선의 독립이였습니다라고 말씀하시였다.

선친의 애국의 뜻을 값높이 평가해주시는 그이를 우러르는 리용선생의 가슴은 그이에 대한 한없는 고마움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는 리용선생을 미덥게 바라보시며 수령님께서는 미제의 대조선정책을 규탄하시고 민족분렬의 위기를 타개하는 유일한 출로는 북과 남의 모든 애국력량을 묶어세워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외세를 배격하고 통일적인 민주주의중앙정부를 세우는것이라고 절절하게 말씀하시였다.

며칠후 선생은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앉은 련석회의에 참가하여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우려하는 모든 사람들이 당파와 종교의 소속, 정치적견해를 가리지 말고 단결하여 구국투쟁을 벌릴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력사적인 보고를 들으면서,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남조선의 우익정객들까지도 극적인 인생전환을 하는것을 보면서 크나큰 감동에 휩싸이지 않을수 없었다.

진정 우리 민족의 력사가 깊어 반만년이라 하지만 그 언제 이렇듯 사상과 리념이 다르고 정견과 신앙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흐름에 합류시켜 통일애국의 길에 내세워준 위대한 령도자를 높이 받들어모신적이 있었던가!

련석회의가 끝난 다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용선생을 저택으로 부르시여 단란한 분위기속에서 다시 만나주시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과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녀사의 따뜻한 은정을 받아안은 리용선생은 끝없는 감동에 휩싸여 이제부터 자기는 장군님의 슬하에서 절대로 떠나지 않고 새 조선건설에 모든것을 바치겠다는것을 정중히 말씀올리였다.

리용선생의 애국애족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고 중앙정부를 구성하시는 뜻깊은 자리에서 그를 도시경영상으로 임명하시였다.

순간 선생은 자기의 귀를 의심하며 북받쳐오르는 감동의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둘러보면 지난날 조국해방을 위한 항일혈전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항일투사들은 얼마나 많고 국내외에 이름이 알려진 애국자들, 해방후 나라의 주인이 된 로동자, 농민출신의 대의원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도 선친의 뜻을 이어 애국충정을 다하기를 바라시며 그를 내각성원의 한사람으로 내세워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내각성원들의 취임선서식에 참가한 리용선생은 방황하던 인생을 구원의 품에 안으시여 고목에도 꽃을 피워주시는 재생의 은인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지혜와 정력, 몸과 마음을 다 바쳐나갈것을 다시금 굳게 다짐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내각을 조직하신데 이어 새로 임명된 첫 내각성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시였다.

내각성원들모두에게 있어서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였다. 도시경영상인 리용선생도 위대한 수령님을 모시고 사진을 찍는 행복과 기쁨을 안고 내각성원들과 한자리에 섰다.

이윽고 사진을 찍으려고 할 때였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뒤줄에 서있는것을 아시고 리용선생이 왜 뒤에 서있습니까,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가 앞으로 나오자 나이많은분이 뒤에서 찍으면 되겠습니까라고 하시며 친히 자리까지 잡아주시였다.

순간 그는 눈물이 핑 어리고 격정이 치솟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피눈물뿌리며 이역땅을 헤매이던 때, 온갖 반동들이 살판치고 애국이 매국에 유린당하는 남녘땅에서 분노로 가슴치던 때 그에게는 얼마나 인정이 그립고 믿음이 그리웠던가.

그러하던 인생을 한품에 안으시여 해방된 새 조국의 초대내각성원으로 내세워주신것만도 고맙기 이를데 없는데 력사적인 이 장소에서 또다시 친히 가까이에 불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

선생은 곡절많은 자기 인생이 로년기에나마 은혜로운 어버이품에 안겨 삶의 보람을 마음껏 누릴수 있게 되였다는 감격과 기쁨으로 하여 도저히 흥분을 누르지 못하였다.

그는 사나운 풍상속에 시들던 인생에 청춘의 활력을 안겨주시고 나라의 중임을 맡겨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은덕에 보답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하였다. 그는 년로한 몸이였지만 일제시기의 기형적이며 퇴페한 낡은 도시의 흔적을 없애고 근로하는 인민의 새 도시를 꾸리기 위하여, 도시를 계획적으로 관리운영하기 위하여 모든것을 아낌없이 바쳐나섰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전쟁이 한창이던 주체40(1951)년 12월 리용선생에게 사법상의 중임을 맡겨주시였으며 전후복구건설로 들끓던 1953년말에는 무임소상으로 내세워주시였다.

당시 60이 훨씬 넘은 그에게 이런 중임을 맡겨주신데는 그의 삶을 민족과 더불어 영원히 빛내여주시려는 그이의 숭고한 뜻과 의리가 담겨져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54년 8월 66살을 일기로 리용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누구보다도 가슴아파하시며 장례를 국장으로 치르도록 대책을 세워주시고 자신의 존함으로 된 화환을 보내주시였다.

그후 수십여년세월이 지나 애국렬사릉이 건립되였을 때 먼저 간 애국렬사들의 모습을 한사람한사람 그려보시던 수령님께서는 첫 도시경영상이였던 그의 이름을 정을 담아 불러주시며 애국렬사릉에 그의 유해를 안치하도록 크나큰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이리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품속에서 한생을 빛내인 리용선생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영생의 언덕우에 《도시경영상 리용선생》이라는 비문을 남기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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